X
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보 번햄. 사진 넷플릭스
[OTT뉴스=장혜연 OTT 평론가] 장마가 온다.
집에서 나가자마자 푹 젖은 발로 지하철을 타야 하고, 분명히 빨았는데도 어딘가 꿉꿉한 옷을 입어야만 하고, 맛집 탐방은커녕 주말에도 꼼짝없이 집에서 배달 앱이나 들여다봐야 하는 시기가 오고야 말았다.
못 나가면 어때, 선풍기 앞에 앉아 포카칩 먹으면서 넷플릭스나 보면 되지.
넷플릭스를 켰더니 한 코미디 쇼의 제목이 눈길을 끈다.
바로 <보 번햄: 못 나가서 만든 쇼>다.
미국의 코미디언이자 싱어송라이터, 배우이자 감독인 보 번햄이 집에서 혼자 쓰고 촬영하고 편집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코미디 쇼다.
미국식 스탠드업 코미디를 즐겨보기도 했겠다 싶어서 틀어봤는데, '스탠드'업 코미디는 아니지만 재밌다.
1. 뭐라 정의될 수 없는 장르의 걸작
<보 번햄: 못 나가서 만든 쇼>의 첫 인상은 "이게 뭐지?"다.
<개그콘서트>와 <코미디빅리그>에 익숙했고, 파격적이라고 생각했던 코미디는 <SNL 코리아> 정도였던 나뿐만 아니라, 코미디 꽤 봤다 하는 사람에게도 특별한 형식의 콘텐츠였을 것이다.
보 번햄이 직접 쓴 음악으로 만든 뮤지컬인지, 코미디언 혼자 의자에 앉아 진행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인지, 아니면 보 번햄이 혼자 방 안에서 살아남는 과정을 보는 다큐멘터리인지, 한 단어로 정의하기 어렵다.
나는 팬데믹 동안 오만 OTT를 섭렵하면서 '시간 낭비'만 실컷 했는데, 이렇게 새로운 형식의 '쇼'를 기획하고 멋지게 완성한 사람도 있다니, 스스로가 한심스럽기도 하다.
이 쇼의 장르를 한 단어로 정의할 순 없지만 신선한 형식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제일 흥미롭게 본 건 리액션 영상과 라이브 게임 플레이 콘텐츠.
성공한 CEO처럼 연기하며 인터뷰 영상을 찍는 모습에서는 강유미 씨가 유튜브에서 진행하는 롤플레이 콘텐츠와 김갑생할머니김의 이호창 본부장의 신년 인사를 처음 보며 느꼈던 충격을 다시 느끼게 된다.
TV에서도 비슷비슷한 캠핑 소재의 프로그램, 연예인의 독립생활을 보여주는 관찰 예능, 막장의 끝을 향해가는 드라마밖에 없는 상황에서, 완전히 새로운 실험적인 쇼를 볼 수 있다는 게 상당히 고마웠다.
'재능 낭비'라는 단어도 떠오른다.
이렇게 좋은 노래를 쓰고 이렇게 신박하게 조명을 연출할 수 있는 재능이 있는데, 집에서 이런 쇼를 만든다고?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보 번햄이 부르는 노래가 너무 좋아서 음원으로 나오면 좋겠다 싶었다.
세상에는 참 천재가 많다.
X
<보 번햄: 못 나가서 만든 쇼>의 한 장면. 사진 넷플릭스
2. 웃기는 일을 그만두지 말아 주세요
<보 번햄: 못 나가서 만든 쇼>는 코미디에 대한 고찰을 담은 노래로 시작한다.
"♪ 코미디는 끝난 건가? 누가 이런 시국에 농담을 듣고 싶겠어요. 이런 시국에 농담을 해야 할까요?" 하던 노래는 "♬ 코미디로 세상을 치유해요~ 코미디의 형언할 수 없는 힘으로" 하며 끝난다.
타인과 단절되고 차단되면서 외로움이 가장 큰 감정이 된 시점에서, 코미디가 강력한 치료제라는 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보 번햄 같은 재능 있는 코미디언들이 포기하지 않고 웃음을 만들어주면 좋겠다.
'백인 여자의 인스타그램' 노래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보 번햄이 이 노래를 부르는 내내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얀 이불 위에서 시리얼 먹기, 뜬금없는 소설책과 인용 문구, 블루베리를 얹은 요거트 볼과 나무 숟가락, 얼굴에 비친 무지개 조명까지, 인스타그램을 켰다 하며 나오는 지겨운 사진들을 이렇게 웃기게 묘사할 줄이야.
평소에 느끼던 피로감과 짜증을 그대로 담아내서 정말 소름 돋았다.
X
<보 번햄: 못 나가서 만든 쇼>의 원제 'INSIDE'. 사진 TV FANTANIC 출처
가볍게 볼 수 있지만 MZ 세대와 인터넷 세상, 지루함과 외로움에 관한 깊고 무거운 통찰력이 담겨 있는 종합 예술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보 번햄이 이 특별한 쇼를 제작하는데 1년 이상 걸렸다고 한다.
긴 시간 동안 동료나 관객도 없이 혼자만의 고뇌를 했으니 큰 우울감이나 피로를 느꼈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작품의 후반부로 갈수록 '텐션이 떨어진다'라거나 영상이 점점 무거워진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SNS에서 사용되는 밈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웃지 못하는 장면도 분명히 있을 것 같다.
부모님과 함께 거실 TV로 보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코미디다.
장마철 집콕 휴가를 최대한 즐겨보고 싶은 당신에게 이 쇼를 가장 먼저 추천한다.
새로운 예술 장르를 경험하고 싶은 사람에게, 인스타그램에 지친 사람에게, 넷플릭스가 추천한 콘텐츠를 아무리 봐도 볼 게 없다 싶은 사람에게 추천한다.
넷플릭스 <보 번햄: 못 나가서 만든 쇼> ▶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