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포스터와 제목번역에 가려진 명작, <아포칼립스:인류 최후의 날>

이민주 승인 2021.10.01 09:30 | 최종 수정 2022.05.28 12:42 의견 0
영화 <아포칼립스: 인류 최후의 날> 포스터 비교. 사진 다음 영화

[OTT뉴스=이민주 OTT 1기 리뷰어] OTT 서비스를 오랫동안 사용한 사람들이 걸리는 병이 있다.

일명 '볼 건 많은데 볼 게 없네' 병이다.

넘쳐나는 콘텐츠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병에 걸리면 하염없이 스크롤을 내리며 무엇을 볼지 찾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세상엔 참 많은 영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와 같은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스크롤을 한참 내리다 보면 듣도 보도 못한 제목의 영화들이 조잡한 포스터와 함께 자리잡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도대체 이런 영화를 보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내가 영화 <아포칼립스: 인류 최후의 날>을 보게 된 것은 이와 같은 순전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된 지 30분쯤 지났을 때 나는 이 리뷰를 써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목소리를 감지하도록 프로그래밍이 된 로봇을 피하기 위해 인물들은 항상 침묵해야 한다. 사진 다음 영화

◆ 대사 없는 내용 전개, 현대판 무성영화

이 영화는 인류를 말살하려고 하는 기계에 의해 대부분의 인간이 희생당한 세상에서 저항하는 두 남녀를 그린다.

인간의 목소리를 감지하는 로봇 때문에 그들은 항상 침묵을 지켜야 하며 기계에 의해 발각되면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

여기까지 보면 설정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러나 내가 주목한 것은 이 영화의 연출이었다.

마치 2인극을 보는듯한 느낌을 주는 절제된 연출, 거대한 기계들의 미래주의적이고 과장된 모습, 인물들의 침묵을 대체하고 적절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배경 음악.

이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영화를 본 후 나는 이 영화를 흑백판으로 제작해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제돼 있으면서도 잘 구성된 연출이 마치 무성영화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비슷한 설정의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나 <터미네이터>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 원제 <A Living Dog>의 의미

이런 개성 있는 영화에 붙여진 제목이 고작 <아포칼립스: 인류 최후의 날>이라니.

그리고 조악한 세기말 감성의 저 포스터는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영화의 전반에 깔린 절제된 분위기를 잘 드러내는 외국 포스터와 너무 대조적이지 않은가.

사실 이 영화의 원제는 <A Living Dog>이다.

A living dog is better than a dead lion(살아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이라는 글귀에서 따온 제목인 것이다.

이 짧고 강렬한 제목은 삶에 대한 주인공 토마스츠(스테판 에벨 분)의 태도 변화를 잘 드러낸다.

초반에 토마스츠는 생존을 위해 비인간적인 짓도 서슴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릴야(시리 나제 분)를 만나고서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적 인물로 변화한다.

글귀에 등장하는 살아있는 개가 죽은 사자가 되며 비록 생명은 잃었으나 더 나은 존재로 이행하는 지점이다.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귀의 원래 의미를 교묘하게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판 제목에서는 이러한 은유적 의미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영화 속 로봇이 주는 위압감은 웅장한 사운드 덕에 배가된다. 사진 다음 영화

◆ 포스터와 제목: 영화의 첫인상

선입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조차도 새로운 이를 만났을 때 무의식적으로 첫인상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하물며 지극히 시각적인 매체인 영화를 대하는 관객들은 오죽할까.

포스터와 제목은 그 영화의 첫인상이다.

만약 이 영화의 국내판 포스터와 제목이 해외판을 차용했다면 영화를 보려고 하는 관객들도 더 많지 않았을까.

훌륭한 연출에 관해 분석과 평론까지 가능한 이 영화를 평가절하한 것은 다름 아닌 포스터와 제목이었던 것이다.

이 계기로 나는 좀 더 다양한 영화들을 편견 없이 접하고, 좋은 영화를 발굴하려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부디 국내 영화 포스터와 제목 번역이 개선돼 더 많은 영화들이 빛을 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영화 <아포칼립스: 인류 최후의 날>, 아니, <A Living Dog>은 왓챠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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