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뉴스=이수미 OTT 2기 리뷰어] 그날은 이 남자의 운수가 좋지 못한 날이었다.
돈을 받아내야 할 거래처 사람은 방에 있으면서도 없는 척하고, 출근 후 커피 한 잔 마시려는 차에 커피 믹스가 다 떨어졌다.
사장은 돈 못 받아왔다고 한소리하고, 점심에는 새로 생긴 보쌈집에라도 가볼까 했더니 줄이 길게 서 있어서 맨날 가던 지긋지긋한 백반집에 또 가게 됐다.
메뉴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고 그저 '오늘의 백반 7,000원'이라고만 떡하니 쓰여 있는 식당.
'우리에겐 메뉴를 고를 자유도 없는가.'
메뉴 고르는 것도 귀찮다는 둥 어차피 먹으면 똥 될 꺼 뭘 먹든 비슷하다는 둥 회사 동료들의 말이 남자의 심기를 건드린다.
하루에 한 번뿐인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게 귀찮다니, 그건 인간의 기본 권리를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다.
먹을 게 없는 게 아니라 먹을 돈과 시간이 없는 거겠지.
그날따라 보쌈에 꽂힌 이 남자, 지금 당장 '최강 장인의 손맛으로 버무린 레전드 보쌈'을 먹어야겠다는 이상한 충동에 사로잡힌다.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 남자,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당당하게 외친다.
"어머님 여기 보쌈 소짜, 아니 대짜 하나 주세요!"
그나저나 회사 점심시간은 훌쩍 지난 것 같은데… 이래도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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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추에 고기와 채소, 쌈장을 야무지게 싸서 한가득 입에 넣는다.
'이것은 꿀맛이라는 흔한 말로는 부족하다. 입안에서 폭죽이 터진다. 화려한 맛의 하모니가 불꽃이 돼 입안 가득 수놓아진다'
아주 미식가 납셨다.
누가 보면 한평생 맛있는 음식만 고집한 사람인 줄 알겠다.
회사 전화도 쌩깐 채 야무지게 보쌈을 싸 먹는 남자.
회사로 돌아가서는 당연히 된통 깨진다.
얼씨구, 어디를 가서 그렇게 맛있게 먹나 했더니 보쌈 먹으러 마장동까지 갔단다.
엉거주춤 자리에 앉아 시말서를 쓰다가 문득 기분이 나빠진 남자.
근데 내가 보쌈 먹은 게 죄야? 보쌈 먹은 게 죄는 아니잖아?? 내가 왜 시말서까지 써야 해???
점심 메뉴를 고르는 건 나의 자유, 나의 권리가 아닌가? 이런 회사 그만두면 그만이지!!
그렇게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그만둔 주인공, 시작부터 이렇게 대책 없어도 되는가!
보쌈 때문에 10년 다닌 회사를 그만둔 이 남자의 이름은 남금필(박해준 분)이다.
고등학생인 딸이 한 명 있고, 이발소를 하는 아버지와 함께 산다.
회사를 그만둔 지 3개월이나 지났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아직도 빈둥빈둥.
점심시간에 어물쩍 일어나서는 TV를 보며 양푼에 밥을 비벼 먹는 게 그의 하루 시작이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버지는 그런 아들이 한심하기만 하다.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압니다. 한심한 백수라고 생각하시죠. 저는 백수가 아니라 자아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입맛은 없지만 억지로 먹고 있는 중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생활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붙잡아야 하니깐요."
하지만 당신 아들의 말대꾸는 아주 수준급이다.
술 사주는 친구한테는 "그건 그저 그런 보쌈이 아니라 돈과 시간대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자유 의지의 표상이라는 걸 니 따위가 아니?"라고 하지를 않나.
하여튼간에 본인은 대단한 철학이 있는 듯, 말을 아주 잘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남이 듣기엔 그저 멍멍이 소리일 뿐이다.
◆ 44춘기가 대체 뭐야?
우리의 주인공 금필은 44춘기, 자발적 백수 되시겠다.
사춘기, 갱년기는 들어봤어도 44춘기라는 말은 난생처음 들어본다.
44세라는 금필의 나이에 맞게 '사'가 더블로 들어가 있으니 어찌 됐건 사춘기보다 두 배로 골치 아플 건 확실하게 느껴진다.
보쌈이 먹고 싶단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고 이제 와서 자아를 찾고 있다고 말하는 금필의 철없는 모습은 확실히 골을 당기게 한다.
남이 버린 자전거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금필의 모습은 또 어찌 보면 아이 같기도 하다.
금필 역을 맡은 배우 박해준 역시 인터뷰에서 금필의 양가적인 모습을 언급한 적 있다.
박해준은 "어른들에게 순수함은 철이 없다는 뜻으로 바뀌는 것 같다. 그래서 어른들은 순수함을 감추고 철든 사람처럼 행동하며 살아간다. 반면 금필은 다른 사람 눈치를 잘 보지 않는데, 그런 철없음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속 시원함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주인공이 너무 비호감이라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을 시청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44세의 나이에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이 민폐라고 느껴져서 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꿈꿨던 일들을 우선 저지르고 보고, 실패해도 노력하고 꿈꾸는 금필을 본 누군가는 그 모습에 위로와 용기를 받지 않을까?
자기와 똑같은 백수인 줄 알았던 사람이 돈 잘 버는 만화가라는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본인도 만화가가 되겠다며 대뜸 태블렛부터 사고 보는 금필.
20만 원이 없어서 딸에게 구질구질하게 돈을 빌리는 금필.
중고 타블렛 판매자가 깎아준 4만 원 중 3만 원을 되돌려 줬다는 사실에 뿌듯해하고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실수로 태블렛을 고장 내는 금필.
과연 그는 해학을 담고 철학을 담고, 인생의 메시지를 담은 만화를 그릴 수 있을까?
만화 작가가 돼 남들이 연연하는 천박한 부와 본인이 꿈꾸는 명예로운 삶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을까?
솔직히 금필이 성공할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들고, 아주 제대로 혼쭐이 나야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가장 먼저 드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주변의 우려에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운 일에 뒤늦게 도전하는 것이 얼마나 큰 결심인지 알기에, 이왕 해볼 거면 성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내심 든다.
누군가의 포기를 발판 삼아 도전을 시작한 금필, 그가 답답하고 복장 터지더라도 우선 그의 선택을 지켜보는 건 어떨까?
44세에 새로운 꿈을 시작한 금필의 도전기를 담은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은 티빙 오리지널 작품으로 티빙에서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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