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뉴스=이희영 OTT 평론가] 넷플릭스 드라마 <셀프 메이드: 마담 C. J. 워커>의 주인공, 세라(옥타비아 스펜서 분)의 가장 큰 경쟁자는 바로 미용사 애디(카먼 이조고 분)다.
그는 세라에게 자신이 개발한 발모제를 소개해 준 구원자였으나, 한편으로는 그를 멸시하고 모욕한 적이기도 했다.
그 경멸의 원천은 바로 자신의 밝은 피부색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백인 지주였던 탓에 평범한 흑인들보다 피부가 밝았기 때문이다.
타고난 피부색만으로 차별의 대상이 된 흑인들은, 자신들을 억압한 그 기준으로 스스로 그 차별을 답습하고 있었다.
지난 11월 10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패싱> 역시 이 드라마와 비슷한 결을 갖고 있다.
작품은 넬라 라슨이 1929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됐고, <프레스티지>,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등에 출연한 배우 레베카 홀의 감독 데뷔작으로 화제가 됐다.
'패싱(passing)'은 개인이 자신이 속하지 않은 사회집단의 일원으로 보이거나, 또는 그 일원으로 보이도록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다.
영화 <패싱>에서 이 단어는 흑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백인 행세를 하는 행위의 의미로 사용됐다.
작품의 두 주인공 아이린(테사 톰슨 분)과 클레어(루스 네가 분)는 이 '패싱'이 가능한, 밝은 피부의 흑인 여성이다.
아이린은 아이의 책을 구하는 등의 경우에만 백인 행세를 하지만, 클레어는 백인 남자 존(알렉산더 스카스가드 분)과 결혼함으로써 본인의 정체성을 버리고 완전한 백인으로 살아가기를 택한다.
아이린이 12년 만에 만난 동창 클레어를 보고 느낀 첫 감정은 경멸이었다.
흑인의 정체성을 버리고 백인의 사회에 편입해 살아가려는 그의 모습은 우습고도 비겁했기 때문이다.
흑인 남성과 결혼했고 흑인복지연맹의 조직위원으로 활동하는 그였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의 남편은 아이린의 면전에서 흑인을 모욕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연민 역시 존재했다.
1920년대 미국에서 흑인으로 살아가는 삶이 어떠한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흑인을 싫어하지 않는다, 혐오한다'라는 말이나 '만나본 유색인종은 하인뿐이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만큼 노골적인 차별이 만연한 시대였다.
자신다움을 버리고 언제 거짓말이 탄로 날지 모르는 위태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는 친구는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린은 자신의 집을 계속 찾아오는 그를 외면할 수 없었고 그를 파티로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을 사랑하고 흑인 인권을 위해 열성적으로 활동한 그라도, 결국은 당시 사회를 살아가며 그 분위기에 스며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흑인임을 밝히지 않은 클레어가 파티에서 모두의 주목을 받는 것, 남편 브라이언(안드레이 홀런드 분)과 사적인 연락을 주고받을 만큼 친밀해진 것은 자신의 안정적인 울타리를 침범하는 행위였다.
그로부터 일어난 거슬리는 감정에는 백인 행세를 하는 그를 향한 열등감과 경멸이 뒤섞여 있고, 이러한 상태에 백인과 흑인의 권력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아이린은 가정의 평안을 중시하는 인물이다.
남편이 두 아이의 앞에서 흑인 남성이 백인들에게 처참하게 폭행당한 사건 등 민감한 일을 말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한 그의 가족 앞에 어느 날 떨어진 클레어는 행복을 파괴하고 인종 차별을 굳이 눈앞에 가져다 보여주는 불편한 존재였던 것이다.
부유한 '백인'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 말미에 나타나는 클레어의 추락사는 미궁 속으로 빠진다.
그가 존과 세상에서 벗어나려 스스로 뛰어내린 것인지, 아이린이 자신의 감정에 매몰돼 그를 밀어버린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추락한 클레어의 시체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을 뒤덮는 흰 눈이 화면을 가득 메우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마치 인종을 포함한 모든 잣대를 표백해 버리겠다는 듯이 말이다.
<패싱>의 흑백 화면에서 아이린과 클레어를 비롯한 사람들의 피부색은 모두 같은 회색빛으로 치환된다.
그들의 피부색을 구별하는 유일한 기준은 명암이 된다.
얼마나 밝아야 백인인지, 얼마나 어두워야 흑인인지 아무도 답을 내릴 수 없다.
이렇게 간단한 조치만으로도 구별할 수 없는 이 편협한 기준은 당시의 사회와 삶과 자아를 멋대로 휘둘렀다.
아이린과 클레어의 가장(假裝)은 내가 누구인지도, 내가 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던 시대에서 조금이나마 더 안전하고 덜 부당한 삶을 영위하고자 한 처절한 노력이다.
그들의 밝은 피부는 그들이 이따금, 또는 줄곧 권력을 쥘 수 있는 특권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비참한 현실을 각인시키며 그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족쇄이기도 했다.
이 족쇄 아래 그들의 언행은 시스템 내부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그 안에서 서로를 속이며 날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셀프 메이드: 마담 C. J. 워커>에서 애디는 거대 거래처와 계약한 마담 C. J. 워커에게 그를 고소하겠다고 협박한다.
그런 그에게 세라는 이렇게 답한다.
"난 너와 같이 일하고 싶었어. 너한테 빌었잖아. 하지만 넌 날 뿌리쳤지. 너와 함께 일할 수 있다면 뭐든 했을 거야. 인생은 짧아, 애디. 내려놔. 백인들이 흑인을 죽이는 세상이야. 사소한 걸로 싸우는 건 하지 말아야지."
<패싱>은 넷플릭스에서 시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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