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절벽을 건너라, <더 체어>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체어>

이희영 승인 2021.08.29 11:30 의견 0
<더 체어> 포스터. 사진 넷플릭스

[OTT뉴스=이희영 OTT 평론가] 8월 20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체어>가 공개됐다.

<그레이 아나토미>로 유명한 한국계 캐나다인 배우 샌드라 오가 주인공을 맡았다.

펨브로크 대학의 영문과 교수 지윤(샌드라 오 분)이 여성 최초로 학과장('The chair')에 부임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야심 차게 시작한 '장(長)'의 일이지만 그의 일과는 으레 떠올릴 법한 명예나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다. 사무실 의자부터 부실해 취임 첫날에 앉자마자 망가져 버렸다.

오히려 사무실 명패의 문구 '온갖 잡것 중 우두머리 잡것(F*cker in Charge of You F*cking F*cks)' 그대로, 위기의 영문학과를 살려야 한다는 사명 아래 온갖 일을 맡느라 바쁘다.

수강생이 거의 없는 엘리엇(밥 밸러밴 분)을 비롯한 노교수들의 해임 건을 논의해야 하고, 젊은 흑인 여성 교수 야스민(나나 멘사 분)의 우수강의 지정도 추진해야 한다.

이 와중에 조앤(홀런드 테일러 분)의 사무실은 느닷없이 체육관 지하로 옮겨져 버렸고, 빌(제이 듀플라스 분)의 강의 중 행동이 SNS에 퍼지며 큰 논란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학교 일이 끝은 아니다.

정체성의 혼란에 빠져 있는 입양 딸 주희(에벌리 카가닐라 분)를 홀로 돌보는 일 역시 또 다른 도전이다.

아버지는 '학과장 되면 일 덜 할 줄 알았다'라며 한숨 쉬고, 다른 가족들 역시 마흔여섯인 그가 결혼하지 않는다며 수군거린다.

학과장 사무실의 지윤. 사진 넷플릭스 예고편 캡처

사실 지윤의 학과장 발탁은 '유리 절벽'으로 읽음직하다.

유리 절벽은 실패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만 여성을 고위직에 승진시킨 뒤, 일이 실패하면 책임을 물어 해고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영문학과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중책을 맡겼지만, 학장을 비롯한 학교 인사들 모두 '요즘 젊은이들은 콘텐츠 제작에 더 흥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윤 본인마저 이를 인지하고 있었으며, "누가 시한폭탄을 떠넘긴 기분이야. 여자가 들고 있을 때 터지라고 말이지"라고 불편한 속내를 토로하기도 했다.

어떤 선택을 내리든 지윤은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동양인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그에게 언제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내려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중했다.

학장과 교직원들의 사이에 끼어 압박과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승진하더니 달라졌다'는 비아냥, 빌을 변호하자 그와의 사적 관계를 묻는 보이지 않는 차별, 그리고 데이비드 듀코브니(데이비드 듀코브니 분, 본인 역 특별출연)의 초빙을 지시받은 상황에 대한 빌과 야스민의 원망을 동시에 들어야 했다.

그래도 지윤은 포기하지 않는다.

야스민의 펨브로크 잔류와 종신 임용을 위해 분투하고, 소수인종 교직원에 대한 의견을 단호하게 주장한다.

정직당한 빌의 조교 라일라(맬러리 로우 분)가 논문 지도를 받을 길을 적극적으로 알아봐 주기도 한다.

울음을 터뜨리면서도 쌓여 있는 빨래를 갠다.

<더 체어>는 과장이나 극적인 연출 없이 평이하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현실을 그대로 화면 안에 옮겨온 것처럼.

회의를 진행하는 지윤과 영문학과 교수들. 사진 넷플릭스 예고편 캡처

<더 체어>의 결말 역시 놀랍지 않다.

학생들의 시위를 잠재우기 위해 빌은 해고되고, 지윤 역시 불신임 투표로 학과장직에서 물러난다.

투표를 제기한 엘리엇이 차기 학과장으로 나서려 하였으나 지윤은 그 자리를 조앤에게 넘긴다.

'온갖 잡것 중 우두머리 잡것' 명패까지 이어받긴 했지만, 그 역시 학과장으로서 일을 꾸려나갈 것이다.

조교수 임용 때부터 임금 차별을 위시한 성차별을 온몸으로 경험하며 현재의 자리까지 올라왔기 때문이다.

펨브로크 대학 영문과를 포함한 현실에는 여전히 골치 아픈 문제가 많다.

올바름을 실현하려는 움직임이 점차 커지고 있지만, 암묵적인 부조리 역시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간단한 처방으로는 뿌리 뽑을 수 없을 것이다.

지윤이 청문회에서 말했듯, 누군가를 해고하는 것만으로 문화는 바뀌지 않는다. 시스템을 바꾸어 지도 체제를 개선해야 한다.

일시적인 조치로 학생들을 관리하려 들지 말고, 건강한 의견을 꾸준히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귀를 열어야 한다.

지윤의 말과 삶은 본인과 교수들뿐만 아니라 영문학을 비롯한 인문학계, 그리고 소수인종과 여성을 대하는 사회 공동체를 향한다.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올바른 방향을 찾아 나아가리라는 신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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