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뉴스=전여진 OTT 평론가]
◆ 술잔을 기울이며 보는 OTT 리뷰, 넷플릭스 오리지널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야! 누가 얘 다리 좀 못 움직이게 묶어 봐!"
"힘이 왜 이렇게 센 거야! 뒤통수 때려서 기절시키면 안 돼?"
"팔 못 움직이게 잡았어! 하나둘 셋 하면 들어서 옮기자! 하나둘 셋!"
조폭 영화에서나 오갈 법한 살벌한 대사로 보이는가?
사실은 20대 세 여자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친구(서영)를 옮기기 위해 애쓰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서영을 보며 마른 몸매와 청초한 외모를 갖춰 상견례 프리패스 상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녀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술만 마시면 '개'가 되는 것이다.
전남친 부모님과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처음 술을 접한 서영이는 내면의 주당이 눈을 떴고, 미래의 시부모님과 어깨동무한 채 버즈 노래를 완창했다.
우리는 유쾌하게 웃었지만, 집안 대대로 교수에 공무원을 지내는 전 남친네는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서영이의 술이 깨며 결혼을 생각하던 2년의 연애도 깨져버렸다.
그날 이후로 서영이는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입에 달고 살았고, 그때마다 '그분'이 강림했다.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이던 마음 여린 서영이에게 자동차만 보면 밟고 올라서는 '파괴 본능'이 말이다.
화가 많아진 것은 비단 서영뿐만이 아니었다.
글을 쓰다 컴퓨터가 나가버릴 때, 출근 중 눈앞에서 버스를 놓칠 때, 진상 손님을 만났을 때, 나는 일명 '샷건'이라고 책상으로 주먹으로 내리치는 행위를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폭력적으로 느껴지겠지만, '나무는 쳐도 사람은 치지 않는다'는 신사적인 정신 아래 나의 화를 다스리고 있다.
화가 많아졌다는 고민은 다른 두 명의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윤서는 전자담배를 피우기 시작했고 현주는 복싱학원을 등록하며 집에 샌드백을 샀다.
서영은 하수구에 구토하더니 지나가는 노란색 람보르기니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금전 감각 있는 의리파 윤서가 서영이를 막기 위해 뒤따랐고, 나와 현주는 땀범벅이 된 채로 주차된 자동차 뒤에 숨어 쭈그려 앉았다.
현주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나는 한참을 생각하다 그 말에 맞장구쳤다.
"나도"
■ 당신의 <지구망> 이유는?
<지구망>의 등장인물을 보자마자 정신이 아찔해졌다.
학생들에게 벌점 대신 돈을 걷는 기숙사 조교 세완(박세완)부터 마음의 문을 꼭 닫은 제이미(신현승), 허세와 허언증이 심한 쌤(영재), K-문화를 사랑하는 민니(민니), 기숙사에 몰래 들어와 사는 현민(한현민), 내로남불 끝판왕 한스(요아킴), 젊은 꼰대 카슨(카슨), 카사노바 테리스(테리스 브라운) 까지!
하루도 조용히 넘어갈 날이 없겠다 싶은 범상치 않은 캐릭터들만 모아놨다.
특히 주인공인 세완은 이미 깨진 핸드폰을 실수로 떨어뜨린 제이미에게 물어내라고 멱살까지 잡으며 유난히 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세완이 학생들에게 벌점 대신 돈을 걷고, 수많은 알바를 뛰는 데는 사실 이유가 있었다.
세완의 엄마에게 돈을 못 받은 빚쟁이들이 찾아와 세완에게 돈을 받으러 학교를 들쑤시기 일쑤니 말이다.
각종 알바를 마치고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는 지친 세완의 모습은,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하고 청춘을 즐기는 다른 학생들과 비교돼 더 안쓰럽게 느껴진다.
분명 시트콤이지만 차가운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준다.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말도 사회에 나온 청춘들이 지독한 현실에 못 이겨 자조적으로 내뱉는 게 아닐까?
적막한 밤공기가 싫어 유튜브에서 '기리보이-<아퍼>'를 틀었다.
나는 조용한 소음을 견디고 싶지 않아 어디서건 노래를 듣는다.
전주가 시작되자 현주는 내게 말했다.
"사수가 나 남친 생긴 거 보고 욕하더라"
"남친 생겼다고 말했어?"
"아니. 내 (카카오톡) 프사 보더니, 현주씨 '또' 남친 생겼네요? 이러잖아"
"뭐야, 보여준 것도 아닌데 왜 열폭(열등감 폭발)이야?"
현주와 사수의 질긴 악연은 입사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중이다.
입사하고 한 달간은 천사였지만, 짝사랑하던 부장이 현주에게 호감을 표현했고 현주는 그날부터 갈굼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내 상태는 개앀이지 이제 모두 알어. 모르면 다물어 아는 척하지도 말어. 사회생활 어려워 다음 사람 사겨'
릴타치의 파트가 나오고 5분짜리 노래는 어느새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사물함 뒤졌다는 사람은 신고했어?"
며칠 전 출근하니 누군가 내 사물함을 엉망으로 만들어놨었다.
범인이 특정되는 시간대에 벌어진 일이었고, 그 범인은 줄곧 나에게 짜증 내던 회사 관리자 중 한 명이었다.
"응. 다른 관리자한테 신고하고 열쇠 받았어"
"너도 인생 참 피곤하다. 그냥 다른 데로 옮기면 안 돼?"
"도망치면 낙원이냐?"
지금껏 수없이 겪어 온 일이었고, 이젠 놀라거나 분노하는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동기조차 궁금하지 않았다.
"싫은 사람 절반인데, 괜찮은 사람도 절반이다."
나는 이 문제를 '내 탓'으로 비난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실수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나에게 '그럴 수도 있다'며 '괜찮다'고 하는 직장 동료들과 같은 관리자를 감싸지 않은 회사 직원들의 얼굴이 말이다.
■ 그래도 지구가 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세완을 비롯한 등장인물 저마다 각자의 속 사정은 아프다.
제이미는 자신의 정체를 가십으로 이용하는 파파라치들에 미행당하고, 테리스는 동성을 좋아하고, 카슨은 남자친구 김 병장의 바람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현민은 기숙사에서 쫓겨나고 입영통지서를 받는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시종일관 우울해하지 않는다.
이들은 눈 앞에 현실을 유쾌하고 자신 있게 헤쳐나간다.
제이미는 자신의 마음을 열고, 테리스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받아들인다.
카슨은 다른 여자와 바람 피운 김 병장에게 시원하게 어퍼컷을 날리고, 현민 역시 길에서 1등 당첨 복권을 줍는다.
차가운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세완에게도 세완만 바라보는 자상한 남자친구 제이미가 있다.
시트콤의 재미를 위해 다소 과장되고 억지스러운 부분들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럼에도 등장인물들의 긍정적이고 유쾌한 모습은 시청자에게 오늘을 살아갈 용기를 준다.
두 시간 후에야 잠에 취한 서영이를 들춰 멘 윤서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보고 현주가 물었다.
"차에 안 올라갔어?"
윤서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람보르기니 차주가 대인배시더라."
나는 우스갯소리를 내뱉었다.
"대인배니까 그런 차를 탈 수 있는 거야."
날이 밝아오고 시간은 어느덧 일요일 새벽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편의점에서 시원한 물을 사 와 윤서에게 건넸다.
윤서는 물을 건네받으며 내게 물었다.
"일 가야 하지?"
"가야지"
현주는 가방에서 아이라이너를 건네줬다.
"아이라인 번졌다. 이따 수정해."
나는 주머니에 아이라이너를 넣었다.
"열심히 돈 벌어서 우리 또 술 먹자!"
"괴롭히는 애 있으면 말하고. 우리가 때려줄게"
나는 윤서와 현주의 응원에 빵 터지고 말았다.
"너희들은 진짜 때릴 것 같아ㅋㅋ"
손을 흔들며 나는 알바를 하러 가기 위해 지하철에 탑승했다.
무표정의 지친 사람들을 가득 태운 지하철의 공기는 어딘가 기운이 쫙 쫙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고, 나는 나지막이 내뱉었다.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그때, 주머니 속 현주가 건네준 아이라이너가 생각났고 소중한 친구들과 함께한 어젯밤의 기억이 스치듯 떠올랐다.
나는 고민 끝에 다시 내뱉었다.
"방금 한 말은... 보류할래."
말하지 않아도 나의 아픔을 알아봐 주는 친구들이 있고, 내일이면 더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기에 나는 내일 지구가 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유쾌한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는 시트콤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는 넷플릭스에서 감상할 수 있다.
넷플릭스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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