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러브 앤 아나키>, 예측 불가한 불장난을 따라가야 하는 이유

스웨덴을 배경으로 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러브 앤 아나키>

희진 승인 2021.04.30 07:00 | 최종 수정 2021.05.04 15:06 의견 4
<러브 앤 아나키> 공식 포스터. 사진 왓챠플레이 갤러리


[OTT뉴스=희진 OTT 1기 리뷰어] H&M과 이케아의 나라 스웨덴. '북유럽풍 라이프스타일의 본고장' 스웨덴이 드라마로 우리 곁에 찾아온다면?

여기, 두 남녀의 알 수 없는 비밀 게임으로 시작되는 스웨덴 드라마가 있다.

30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에피소드 8개로 이루어진 이 미니시리즈는 지구 반대편의 '유교 피플'에게 강렬한 해방의 에너지를 선사한다.

아슬아슬한 규범의 줄타기는 난잡함과 혼란함을 경유해 발칙함과 신선한 해방으로 이어진다.

비밀 게임과 줄타기가 이어지는 동안 주목해야 할 세 가지 관전 포인트를 살펴보자.

막스의 핸드폰을 빼앗아가는 소피. 핸드폰을 계기로 둘의 비밀 게임이 시작된다. 사진 넷플릭스 공식 예고편 유튜브 캡처


관전 포인트 ① - 커리어 우먼과 훈훈한 연하남의 불장난 vs 혹은 자아를 찾아가는 비밀여행?

여자 주인공 소피(이다 엥볼)의 자위로 시작하는 첫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토끼 같은 딸과 아들, 건장한 영화감독 남편, 중산층의 잘 정돈된 집에 사는 커리어우먼 소피의 결핍은 앞으로 벌어질 모든 사건의 예고편이다.

홀로 야근을 하던 소피는 사무실에서 자위를 하는데 하필 그 시간에 야근을 하고 있던 남자 주인공 막스(비에른 모스텐)는 이를 발견하고, 전례 없는 그 광경을 사진으로 남긴다.

다음날 그 사진을 지우기 위해 막스를 불러낸 소피는 막스의 핸드폰을 빼앗고, 핸드폰을 돌려받기 위해선 '모두가 놀랄만한 미친 짓을 해봐'라는 소피의 말과 함께 둘만의 아슬아슬한 비밀 게임이 시작된다.

'화내기', '뒤로 걷기', '출판사 사장인 척하기', '작가인 척하기', '모두가 깜짝 놀랄만한 일을 벌이기' 등.

비밀 게임은 처음에는 엉뚱한 일탈에 그쳐 실소를 자아내는 정도지만 뒤로 갈수록 '이것이 허락된 일탈인지 아닌지' 헷갈려 마냥 웃을 수만은 없게 만든다.

사회 규범을 하나씩 분해할 때마다 소피와 막스는 둘만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희열의 눈빛을 주고받는다.

억압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뿐 아니라 해방의 그림자를 서로 걷어내 주었다는 묘한 파트너십이 싹트고 이는 자연스레 사랑의 감정으로 발전한다.

사회적 용인에서 벗어난 이 둘의 불안정하고 위험한 관계를 응원할 수밖에 없는 건, 이들의 사랑이 그저 불장난으로 시작해 짜릿한 일탈을 즐기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가면에 대한 묵직한 울림을 선사하기 때문은 아닐까.

결핍과 억압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지만 그 결핍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 나아가 해소를 위해 한 걸음 내딛는 용기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경험이 아니다. 이들의 비밀 게임을 끝까지 지켜볼 만한 이유다.

여성 편집자이자 홍보 팀장으로 일하는 데니스. 당당하지만 어딘가 완벽하지 않은 페미니스트 역할로 등장한다. 사진 IMDB 이미지 캡처


관전 포인트 ② - 예측 불가 여성 캐릭터

극이 예측 불가로 진행되는 데에는 여성 캐릭터의 발칙함이 한몫을 한다.

페미니즘과 퀴어 정체성, 비정규직 노동자 등 소수자성을 전면에 앞세운 드라마는 아니지만, 각각의 요소와 은은한 발칙함이 어우러져 오히려 서사를 더욱더 단단하게 만든다.

아나키스트이자 강력한 사회주의를 외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소피는 그런 본인의 아버지를 시대착오적 사고에 갇힌 정신병자 취급하는 남편과 함께 살아간다.

부부 동반 모임에 가선 늘 본인을 깎아내리거나 정신병자인 장인 때문에 자식 교육에 방해가 된다는 식의 독설을 서슴없이 내뱉기도 한다.

딸이자 아내 그리고 엄마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소피의 삶은 막스를 만나기 전까진 회색빛이다.

딸, 아내, 엄마 여기에 더해 커리어 우먼이라는 여러 역할은 여성 캐릭터의 억압성과 역할 간 괴리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부여되는 흔한 장치다.

본인의 가면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소피가 매일 밤 화장실에서 몰래 포르노를 보며 자위를 하는 행동은 그래서 흥미롭다.

그 가감 없는 연출은 여성 캐릭터에게 부여된 진부한 장치를 가볍게 벗어던져 버리기 때문이다.

출판사의 여성 편집자인 데니스(기젬 에르도간)라는 캐릭터 역시 주목할 만하다.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숨기지 않으며 당당한 태도로 일하는 유능한 홍보팀장인 데니스에게는 여성 애인이 있다.

데니스는 페미니스트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일견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떤 부분에선 그 기대를 과감히 저버린다.

'데뷔작'이라는 말 대신 '처녀작'이라는 단어를 쓰고선 '뭐가 문제야?' 하는 표정을 짓는다든가, 해당 출판사에서 성 추문 논란이 있는 작가의 책이 출판된다는 사실을 알자 본인의 책을 출판하지 않으려고 하는 애인을 예민하게 바라본다든가 하는 것 말이다.

페미니스트이길 자처하지만 어쩌다 보니 성차별주의자가 된 데니스처럼, 젠더 담론이 더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분위기라고 해서 모두가 옳은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는 듯 드라마는 말한다.

<러브 앤 아나키>는 소피가 예전에 써둔 소설의 제목이다.

'처음엔 씨앗이었다가 싹이 트고 그다음 장미가 되고 나무가 돼 나중엔 혼자 굳건히 설 수 있는 숲이 된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딸에게 들려주며 드라마는 끝이 난다.

극을 리드하는 '예측불허'를 뚫고 가다 보면 마지막엔 각자 숲이 되어 있는 여성 캐릭터를 만날 수 있다.

예상치 못한 게임으로 자아를 찾아 직장을 떠나는 소피, 직장에서 점차 자리를 잡아가는 데니스와 캐롤라인을 바라보고 있자니 우리 앞에 펼쳐질 '예측불허'를 기대해보고 싶어진다.

디지털 시대 아날로그의 대표주자 출판업계의 진통을 보여주는 소피의 표정. 사진 IMDB 이미지 캡처


관전 포인트 ③ - 디지털 시대 아날로그의 진통

디지털 시대 대전환으로 인한 진통에 출판업계를 빼놓을 수 없다.

소피가 컨설턴트로 일하는 출판사는 OTT 시대를 맞아 '스트리머스'라는 스트리밍 회사에 넘겨질 위기에 처한다.

유능한 미국 컨설턴트로 일하던 소피가 이 출판사에서 맡게 된 일 역시 아날로그 방식의 모든 회사 업무를 디지털화하는 일이었으니, 컨설턴트로 일하는 소피에게는 이 대변환의 시기를 기회로 부를 법도 하지만 출판사 직원들에게는 밥그릇을 위협하는 위기로 다가오는 아이러니인 셈이다.

새로운 소재와 방식을 통해 문학의 진정성을 더 많은 사람에게 손쉽게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손쉬운 디지털화로 인해 고유한 문학적 가치가 훼손되는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위기일 수도 있는 상황.

출판업계의 고민을 그저 남 일로 취급해버리기엔 모든 것이 자본의 힘으로 추동되는 시대다. 자본이 몰리는 곳으로 그저 흘러가기엔 변방에 아직도 너무나 중요한 가치들이 많다.

세상의 속도를 지켜보며 나만의 페이스를 조절해야 하는 이유다.

회사의 존폐를 앞둔 소피네 출판사 직원의 생존기는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유효한 생존기는 아닐까.

바야흐로 OTT의 시대라곤 하지만 이조차 10년 뒤에는 어떤 판도로 뒤바뀔지 모르는 게 오늘의 현실이니까.

<러브 앤 아나키>는 격동의 시기의 다양한 진통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드라마다.

지나간 체제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아버지, 그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소피, 가족의 결핍을 누르고 살던 막스,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자본주의 체제라는 타성에 젖어 사는 소피의 남편 요한. 그리고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각각의 가정사와 출판사의 사정까지.

스웨덴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대전환 시대의 이야기가 오늘날 한국의 우리에게도 같은 울림을 주는 까닭은 무엇일까.

빠른 격동의 시대에 각자의 흔들림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는 속도가 허락되길 바라며, <러브 앤 아나키>의 비밀 게임에 동참할 것을 제안한다.

<러브 앤 아나키>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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