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 곳에서 낙원을 만나다, 넷플릭스 <낙원의 밤>

넷플릭스, <낙원의 밤>

홍지후 승인 2021.04.15 11:55 의견 1
영화 <낙원의 밤> 넷플릭스 캡쳐 화면. 출처 넷플릭스


[OTT뉴스=홍지후 OTT 1기 리뷰어] 영화 <신세계> 박훈정 감독이 연출하고 전여빈, 엄태구가 주연을 맡은 넷플릭스 영화 <낙원의 밤>은 새로운 느낌의 영화는 아니다.

놀랄만한 반전도 없다.

그런데 왠지, 진부하지 않았다. 전형적이지 않은 캐릭터의 힘, 배우들의 강렬한 연기, 그들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공기 때문일 것이다.

멍하니 태구(엄태구)를 바라보는 재연(전여빈). 출처 네이버영화


'누아르'에서 여성이 설 자리

<낙원의 밤>의 줄거리는 철저히 누아르의 법칙을 따른다.

조직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태구(엄태구)는 한순간 누나와 조카를 잃게 된다.

다른 조직의 소행임을 확신한 태구는 복수심으로 타 조직의 보스를 칼로 찌르고, 제주도로 도망친다.

그곳에서 태구는 재연(전여빈)을 만나고, 잊고 있던 삶의 아름다움을 조금이나마 맛본다.

모든 걸 잃고 절망한 남자가 새로운 장소에서 여자를 만난다는, 그야말로 뻔한 스토리다.

사실 진부함은 차치하더라도 영화가 '남성 영화'의 안일한 문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에 불편했다.

한국의 '남성 영화'에서 여성은 남성을 위해 아프거나, 다치거나, 사라지거나, 죽기 때문이다.

<낙원의 밤>안에서도 누나와 조카는 태구의 복수를 위해 아무런 설명 없이 희생되었다.

영화의 마지막 즈음, 남성 캐릭터들은 역시 서로를 때리고 던지고 찌르며 남성성을 뽐낸다.

반면,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재연은 그저 울부짖을 뿐이다. 피 튀기는 남자들의 난투극 속에서 재연은 태구를 보며 슬퍼하는 수동적 대상으로 전락한다.

물론 혹자는 그 후 재연이 삼촌과 태구를 대신해 총을 들어 복수한다는 점에서 색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글쎄, 누아르 영화에서 총으로 사람 죽이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죽이고 죽는 싸움.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는 될 수는 없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파괴성,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는 위험성이 영화에 깔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재연이 다시 지독한 복수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그리 통쾌하지 않다.

그 총이 여자의 손에 들려있더라도 말이다.

결국 그 총이 향한 곳은 재연 자신이기 때문이다.

누아르가 죽음과 싸움을 다루는 장르라 하더라도, 그 장르 안에서 다른 가능성을 발견할 수는 없는 걸까?

다른 조직원들을 피해 도망가고 있는 태구(엄태구).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가 자유로워질 때

장르의 문법에서, 관객의 얄팍한 기대에서 벗어날 때 영화는 종종 반짝거렸다.

'남성 영화' 안에서 절망에 빠진 남성의 상대는 대개 아름답고, 매혹적이며 그의 아픔까지 치유해주는 눈 부신 햇살 같은 여성이었다.

그러나 태구의 상대, 재연은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환자다. 태구에게 줄 희망이 없다. 그녀는 어두컴컴한 츄리닝을 입고, 매사에 비관적이고 퉁명스러운 태도로 태구를 대한다.

암흑 속 그들을 이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물회'이다. 물회는 태구의 누나가 허망하게 죽기 전, 태구가 먹고 싶다고 한 마지막 음식이자 태구의 어린 시절을 대표하는 추억이다.

재연은 제주도의 싱싱한 횟집에 태구를 데려가 물회 두 그릇을 시킨다. 그러나 태구는 그 물회를 먹지 않는다. 슬픔이 아직 그를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후, 재연과 태구는 밤바다를 보며 암흑 속에서 대화를 나눈다.

태구는 재연의 아픔에 공감하며 자신의 아픔을 스스로 치유한다.

이 때 재연은 태구를 치유해주는 대상이 아니다. 재연과 태구는 각자의 아픔을 지니고 서로의 어둠을 이해하는 동등한 주체이다.

그리고 그 둘은 그 밤 섹스를 하지 않는다.

남녀, 밤, 바닷가, 술, 담배, 슬픈 사연, 무엇보다 '누아르'라는 장르에 입각해 모든 요소가 그들을 한 침대에 묶어놓으려 하지만 그들은 각자의 방에서 제주도의 밤 풍경을 허하게 바라볼 뿐이다.

다음 날 아침, 물회 집에 간 재연과 태구. 같은 식탁에 앉은 재연과 태구는 물회를 아주 열심히 먹는다.

태구는 암흑에 있더라도 재연과 함께라면 물회와 삶의 새콤달콤함을 즐길 수 있다.

그들은 같이 잠들 순 없지만 같은 식탁에서 같은 음식을 맛보는 연인이다.

조직, 배신, 복수, (예상 가능한 혹은 궁금하지 않은) 반전까지 <낙원의 밤>은 여러모로 뻔한 영화다.

다른 말로 느와르 문법 안에 있는 안정적인, 모범적인 영화다.

하지만 영화를 본 후 당신의 뇌리에 남는 것은 재연과 태구가 서로를 마주하고 이해하는 시간과 그 시간을 비춰주던 제주도의 눈부신 햇살, 눈물 한 방울 없이 비극을 노래하던 재연과 태구 그리고 그 비극을 위로하는 과묵한 밤바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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