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뉴스=김현하 OTT 평론가]
*본 리뷰는 작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 원전 뒤틀기
아마 누구나 살면서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전설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원탁을 이루는 기사들은 저마다 대표되는 유명한 설화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아서왕의 선정의 검을 뽑은 이야기, 란슬롯의 기네비어 왕비와의 러브 스토리, 갤러해드의 성배탐색 이야기 등이 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가웨인 경 역시 란슬롯의 라이벌이자 아서왕의 조카로 가장 유명한 원탁의 기사 중 한 명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영상화된 설화는 바로 '가웨인 경과 녹색기사' 설화이다.
이 설화는 톨킨이 번역한 것으로 크리스마스에 나타나 목을 치는 녹색기사와 가웨인 경의 내기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원전에서 해당 설화에서 강조하는 주제는 완벽한 기사로서의 가웨인의 모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두려움에 굴복할 수밖에 없던 가웨인의 인간성이었다.
하지만 영화가 묘사하는 가웨인(데브 파텔 분)은 이와 정반대이다.
가웨인은 기사 서임도 받지 못한 애송이에다가 창관과 술집을 드나드는 한심한 인간이며 원탁의 다른 기사들과 달리 이룬 위업 역시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런 그는 마지막에서야 진정으로 '기사다운' 선택을 하며 이야기를 끝맺는다.
같은 설화를 다루면서 원전과 정반대의 가웨인이 기능할 수 있는 원리는 무엇일까?
이는 영화 포스터에서부터 선명한 녹색과 적색의 대립으로 시작한다.
▶ 녹색의 어머니
"빨간색은 욕망의 색이고 녹색은 욕망이 남긴 흔적이예요."
버틸락의 성에서 머물 때, 가웨인의 연인인 에셀(알리시아 비칸데르 분)과 같은 얼굴을 한 성주의 아내는 '왜 녹색기사가 녹색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다음과 말을 한다.
이는 사실상 온 영화를 관통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일시적인 욕망과 그 이후에 영원히 남을 흔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대비는 포스터에서부터 시작하여, 크리스마스 날 붉은 피를 흘리는 녹색기사, 우거진 숲에서의 여우, 그리고 성주와 성주부인에게까지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들이 상징하는 개념은 무엇인가?
영화를 본다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녹색이 여자-자연-어머니-그리고 이를 아우르는 'Mother nature' 개념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원전에서부터 - 비록 이 영화에서 의도는 정반대가 되었지만 - 이 모든 계략을 꾸민 사람은 가웨인의 어머니인 모르건 르 페이(사리타 초우드리 분)이다.
<그린 나이트>는 영화 초반부터 원전에서는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지는 진상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계속 관객에게 힌트를 건넨다.
녹색기사는 모르건이 들고 있던 녹색인장의 편지를 그대로 귀네비어 왕비(케이트 딕키 분)에게 건네주고, 성 위니프레드(에린 켈리먼 분)는 녹색기사는 '이미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얘기하여 녹색기사가 사실상 모르간의 분신이라는 것을 확정한다.
이외에도 모르건은 녹색 두건을 두른 채 주술을 시전하면서 녹색 벨트를 가웨인에게 선물로 주는 등, 녹색의 이미지와 계속 엮인다.
이 말은 곧 다른 녹색의 것들도 모르건의 분신-혹은 그 역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녹색 담쟁이 덩굴이 우거진 성에서 청록색 옷을 입은 버틸락 성주의 아내는 모르건처럼 가웨인에게 그를 지킬 수 있는 녹색 벨트를 선물한다.
녹색의 숲과 녹색의 이불은 가웨인이 자신을 보살펴주던 모르건을 연상할 만큼 포근히 그를 덮어준다.
가웨인의 환상 속에서의 모르건은 인간이 죽어도 남아있는 이끼와 자연이 그러하듯이, 아서 왕(숀 해리스 분)과 가웨인이 죽어도 그 자식 곁에서 계속 살아간다.
모르건은 어떤 남자의 욕망이 지나간 후에 남은 여자이며, 자식을 계속해서 지키려는 어머니이자 앞으로도 영원할 자연이자 생명이다.
▶ 붉은 아버지
"네게 위업을 바라는 게 잘못이더냐?"
가웨인이 여정을 나가기 전 그의 집을 방문한 아서왕의 대사이다.
가웨인의 모든 여정은 모르건이 그 배후에 있기에 <그린 나이트>에서 녹색과 모르건이 상징하는 것들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녹색과 대립하는 적색은 상대적으로 영화 내에서 덜 등장하기 때문에 유추와 짐작을 더욱 필요로 한다.
적색이 녹색과 대립하다면 적색은 녹색이 상징하는 바의 반대 의미 - 남자, 아버지, 그리고 유한성 - 을 상징하게 될 것이다.
이 영화에서 붉은 색과 남성이 등장한 장면이라면 대표적으로 버틸락 성주(조엘 에저튼 분)와 저녁식사씬이 있다.
버틸락은 횃불이 타오르는 붉은 빛의 집안에서 아내와 상반되는 붉은 겉옷을 입은 채 가웨인과 기사로서의 명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가웨인과 명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또다른 남자가 있는데 바로 가웨인의 외삼촌이 되는 아서왕이다.
아서왕은 가웨인의 외삼촌이지만, 그를 후계자로 생각하며 자신의 지위인 '왕'을 물려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아버지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개인적인 가설이지만, 아서왕 전설에서 아서왕은 자신의 이부누이와 동침한 적이 있다.
원래대로라면 그 동침에서 태어난 아이는 '모드레드'이지만 <그린 나이트>에 한정하여 그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가웨인이라면 영화의 많은 지점이 설명된다.
아서왕이 'Mother Nature' 개념과 대립하는 'Father Time'인 것이다.
'Father time'가 주로 들고 다니는 것으로 묘사하는 낫은 가웨인으로 하여금 영화에서 처음으로 붉은 피를 내게끔 충동질한 아서왕의 '엑스칼리버'와 비교된다.
그는 다른 기사들의 위업과 전설에 대해 얘기하고 후에는 그의 집에 직접 찾아오기까지 하여 불 앞에서 그의 영웅심리를 타오르게 한다.
가웨인의 환상에서 아서왕은 자신의 아버지인 우서왕이 하였던 일을 반복하고 가웨인 이를 역시 자신의 아들에게 행한다.
바로 욕망에 빠져 정실이 아닌 여자와 관계하여 혼외자식을 낳는 행위로, 영화에서 첫번째로 붉은 조명을 받던 멀린이 우서, 아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웨인의 아들을 데려간다.
또한 정정한 모르건과 달리 그는 곧 죽음으로써 소멸하여 가웨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승계한다.
붉은 여우는 영화 내내 가웨인을 보호하듯이, 혹은 지켜보듯이 그를 따라다니다가 위험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대신 나서준다.
이에 대해 가웨인은 어린 아이가 그 부모에게 투정하듯, 와달라고 했던 적도 없다 소리치면서 여우를 쫓아낸다.
아서는 모르건에게 욕망을 남긴 남자이자 가웨인에게 명예를 반 강제적으로 종용하며 부계승계를 반복하고 소멸한 유한한 아버지이다.
▶ R+G=Y
녹색과 적색의 대립은 작품 전체를 꿰뚫는 요소 중 하나이지만, 영화는 녹색과 적색이 양립 불가라고 얘기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버틸락 성주 부인의 얘기를 보면 이 둘은 늘 서로를 수반하는 듯 보인다.
피도 흐르지 않을 것 같은 녹색기사의 목을 베자 나오는 것은 인간과 같은 붉디 붉은 피였다.
모르건이 선물로 주는 녹색 벨트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안감은 붉은색임을 알 수 있다.
모르건이 꾸민 이 모든 여정은, 이를 단지 '게임'이라고 부르는 아서왕의 합의를 통하여 있음이 암시된다.
또 우리의 주인공-가웨인이 존재한다.
첫 장면에서 왕이 된 가웨인은 노란 로브를 두르고 등장하고, 이후에도 그는 노란 망토를 두른 채 여정을 떠난다.
모두가 알다시피 노란색은 빛의 삼원색에서 초록과 빨강을 합치면 나오는 색이다.
가웨인은 녹색과 적색의 산물-남자와 여자의 산물인 아이이자 기독교와 영국 토속 종교가 합쳐진 아서왕 전설 그 자체이다.
이들은 단순히 두 요소가 공존하기만 하는 요소가 아니다.
단순한 공존이었다면 가웨인은 환상 속에서처럼 영원한 어머니의 보호 아래에서 아버지와 같이 그저 자신의 후대에게 같은 일이 반복되기를 기대하며 소멸하였을 것이다.
모르건과 아서는 자신들의 합일의 결과물이 좀 더 나은 것이 되기를 바라면서, 각각 기사도 정신과 명예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가웨인은 여우에게 유혹받으며 선택의 시간이 되었을 때, 결국 타인의 보호 아래 이뤄진 명예의 허망함을 깨닫고 스스로 그 굴레를 끊기로 결심한다.
거대한 순환을 끊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영화는 원작과 정반대의 가웨인을 선택한 것이다.
<그린 나이트> ▶ 바로가기(왓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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