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챠 <리틀 조>, '멋진 신세계'의 탈을 쓴 '프랑켄슈타인'

왓챠 익스클루시브, <리틀 조>

김현하 승인 2021.07.03 11:00 의견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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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조> 해외 포스터. 바디스내치 장르의 특성이 뚜렷하게 보인다. 사진 MAGNOLIA FILMS/LMK


[OTT뉴스=김현하 OTT 1기 리뷰어] 종종 그런 작품들이 있다.

우리가 겉으로 보이는 'A'라는 내용을 따라가다 보이는 몇몇 장치들을 잡고 파헤치면, 전혀 다른 'B'라는 속살을 내보이는 영화들이 있다.

예를 들어 조던 필 감독의 <어스>는 겉으로는 미지의 복제 인간에게 습격당하는 코즈믹 호러 장르의 모습을 띄고 있지만, 영화의 레퍼런스들을 잡고 분석하면 도널드 트럼프 정권을 비난하는 감독의 의도가 드러난다.

<리틀 조> 역시 그러한 영화들 중 하나다.

영화는 현대 사회와 관련된 두 개의 층위의 고찰을 충돌 없이 유려하게 우리한테 던져 놓는다.

◆ A층위의 이야기

표면의 이야기는 다소 클리셰적으로 보인다.

<리틀 조>는 전형적인 '신체강탈물-바디스내치' 영화의 특성을 보인다.

<리틀 조>에서 식물들이 자신의 번식을 위하여 지구에 침입하여 인간의 몸을 빼앗는다는 전개.
주인공 앨리스(에밀리 비첨 분)가 겪는 다른 사람에 대한 불신.

그리고 감염자와 비감염자의 피아 식별 불가와 같은 갈등 요소들은 바디스내치 영화들과 그 원작이 되는 소설 <바디 스내처>에서 흔히 등장하는 전형적인 장르 공식이다.

더불어 영화는 <향수>의 주인공 역으로 유명한 벤 휘쇼와 향기가 강력하다는 리틀 조를 덧붙여 메타적으로 불길함을 더하고, 앞서 언급한 <어스>에서도 나타나는 푸른색과 붉은색의 대조-치환 연출을 차용하여 등 장르물로서의 특성을 더욱 강화한다.

그렇다면 바디스내치 작품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바디 스내처> 원작이 냉전 시대에 출간된 만큼 많은 평론가들은 이를 주관을 잃고 몰개성화되는 개인과 개인이 속한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공포와 연관시켰다.

<리틀 조> 역시 개인의 주관 상실에 대한 경각심이라는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듯 보인다.

다만, 과거 냉전 시대에 몰개성화를 유발하는 꽃의 근원이 외계에서 온 씨앗-외국의 알 수 없는 흉악한 독재자-였다면, 현대의 꽃은 바로 인간이 주도한 과학의 산물인 것이다.

작중의 등장인물들도 디지털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확산형 여론과 밈에 중독된 현대인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이해에 큰 무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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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킷 코너 분)의 이름을 딴 만든 '리틀 조'. 유튜브 예고편 캡처


◆ B층위의 이야기

하지만 온전히 과학과 기술에 관한 '공포'라고 하기에는 찝찝한 구석이 있다.

관객들이 주인공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영화를 감상하는 순간, 무언가 이상한 점들이 보인다.

우선 주인공과 함께 끝까지 꽃에 저항한 주인공의 동료, 벨라(재닌 더빈츠키 분)와 그 개의 관계가 이상하다.

벨라는 자신의 아끼던 애완견이 꽃가루에 감염된 이후 자신을 적대시하자 자신의 개가 아님을 확신하고 개를 안락사한다.

누군가를 규정하는 것이 겉모습인지 속내인지에 관한 토론은 차치하고서라도 자신이 사랑하던 '바로 그 개'가 아니라고 바로 개를 죽이는 벨라의 모습에서 우리는 위화감을 느낀다.

또, 벨라는 꽃가루가 뇌와 호르몬에 영향을 줘 생물을 우리가 아는 모습이 아닌 다른 누군가로 바뀌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성과 교제하는 주인공의 10대 아들의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은 생각에 빠지게 된다.

뇌와 호르몬의 변화로 인해 부모님이 알던 기존의 자식과 다른 모습-우리는 그것을 보통 사춘기라고 부른다.

사실 주인공의 아들 '조'에게서 '리틀 조'라는 이름 따왔다는 것에서 전자와 후자의 비유는 너무나도 노골적이다.

둘 다 앨리스의 창조해낸 산물이며 앨리스가 예상한 바와 다른 유전자 변형을 보여주자 앨리스는 공포를 느낀다.

리틀 조에 공포를 느낀 앨리스가 이를 폐기하려 할 때 그녀를 말리는 팀원들의 반응은 자식을 버리는 매정한 어머니에 대한 반응을 연상시킨다.

작품 후반부에서 앨리스와 지속적으로 접촉하는 심리 상담가의 입을 통해서 영화는 리틀 조는 어쩌면 맥거핀일 수도 있다고, 어머니는 그저 일에 방해되는 아들을 버리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리틀 조에게 끝까지 저항하는 두 인물-벨라와 앨리스 모두 작중에서 정신적 문제와 연관 지어 나오는 것은 아마 우연이 아닐 것이다.

결말부에서 꽃에 감염된 앨리스는 결국 자신을 두렵게 만드는 아들 '조'를 아버지와 함께 자연에 방생하고 이제 자신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해주는 ‘리틀 조’에 전념하게 된다.

작품의 맥락을 전부 삭제하고 본다면 정말 비정하고 인간답지 않은 어머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옛날 모정이라고 여겨지던 것 중 현대에 와서 과학기술을 통해 비정해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많을까?

이제서야 행복해 보이는 앨리스를 보면서 현대인으로서 다음과 같은 생각에 빠지게 된다.

<멋진 신세계>에서 멋지게 통제된 사회에서 살던 린다에게 존이라는 아들의 탄생은 <프랑켄슈타인>에서 박사가 괴물을 처음 만들었을 때만큼 두려운 경험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평범한 정신에 문제가 생겨야 정신병이 생긴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자연적인 인간은 병든 모습이고, 과학의 도움과 통제를 통해야만 이른바 '정상'이 되는 것은 아닐까?

어머니가 아들을 두려워해도 된다 말하는 이야기, <리틀 조>는 오직 왓챠 익스클루시브를 통해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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