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의 포스터. 사진 IMDB
[OTT뉴스=조수빈 OTT 1기 리뷰어] "사랑한다, 빌리"
여느 날처럼 조안나(메릴 스트립 분)는 하나뿐인 아들 빌리(저스틴 헨리 분)를 재운다.
거실로 나와 불안한 손으로 담배를 집어 든 그녀. 벌써 여러 개비의 꽁초가 재떨이에 수북하다.
일밖에 모르는 남편 테드(더스틴 호프만 분)는 오늘도 퇴근이 늦다.
조안나는 그에게 몇 가지 집안일을 설명해준 뒤, 짐 가방을 든 채 집을 나선다.
남편의 만류도 소용없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그녀도 모른다.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79)>는 갑자기 집을 떠난 엄마와 싱글대디가 되어버린 아빠, 그사이에 끼인 아들의 모습을 통해 결혼, 그리고 가족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부부의 이혼 과정을 담은 넷플릭스 영화 <결혼 이야기>의 원조 격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적용되는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를 세련된 연출로 다루고 있다.
5월 21일 부부의 날을 맞아, 오랫동안 사랑받은 한 가족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부성애는 존재할까
모든 집안일을 조안나한테 맡겼던 테드는 아내가 떠난 첫날 아침부터 혼이 쏙 빠진다.
달걀 껍데기까지 들어간 프렌치토스트는 다 타버리고 커피는 쓰디쓰기만 하다.
생각할 거리가 많아진 탓에 일에도 집중하기 어렵다.
한편, 주로 엄마와 시간을 보냈던 빌리는 아빠가 조금은 못 미더운 눈치다.
엄마가 자기 때문에 떠난 건지, 이제 아빠마저 떠나버리는 건 아닐지 걱정스럽다.
두 남자 모두 조안나의 빈자리가 크기만 하다.
홀로 빌리(저스틴 헨리 분)를 돌보는 테드(더스틴 호프만 분). 사진 IMDB
둘만의 서투른 15개월이 지나고, 테드와 빌리는 부쩍 가까워진 모습이다.
아이에게 무관심했던 아빠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다.
매일 아침 학교에 데려다주고, 놀이터도 가고, 자전거 타는 법도 가르쳐주고, 홀로 조안나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물심으로 노력한다.
빌리가 정글짐에서 떨어지며 큰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상처보다 더 오래갈 아빠와의 추억이 남았다.
이제 테드에게는 아이가 무엇보다 소중하지만,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을 엄마의 부재가 끝나고, 드디어 엄마가 돌아왔다.
하지만 빌리는 세 식구가 이전처럼 함께 살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엄마를 만난 것은 좋지만 아빠와 헤어지기는 싫다.
"때로는 엄마가 떠날 수도 있거든"
결혼 전까지 잡지사에서 일하는 커리어 우먼이었던 조안나는 출산 후, 커리어는 뒤로한 채 7년 동안 오롯이 아이와 남편만 돌보는 삶을 살았다.
남편이 원하는 아내의 모습으로 살아왔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존재감은 점점 사라져 갔다.
아내, 엄마, 딸이라는 역할 뒤의 공허를 감당할 수 없었던 그녀는 '세상에서 할 일을 찾으러' 떠나기로 했다.
일여 년 만에 나타난 조안나는 행복해 보인다.
그녀는 모든 걸 떠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생활을 하며 스스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됐다.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테드보다도 많은 돈을 벌고 있기에 이제는 빌리를 혼자 키울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테드도 물러서지 않는다.
일여 년 만에 만난 크레이머 부부가 식당에서 다투고 있다. 사진 IMDB
크레이머 부부의 다툼은 결국 법정 싸움으로 번진다.
사소한 말 한마디까지도 물고 늘어지는 치사한 공방 속에, 테드가 외친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좋은 부모가 되는 건가요?"
완벽한 프렌치토스트에 필요한 것들
영화의 말미에 이르자 테드의 프렌치토스트 실력은 완벽에 가까워진다.
요리하는 아빠를 돕는 빌리의 모습도 익숙한 듯 자연스럽기만 하다.
이렇게 완벽한 프렌치 토스트를 만들기까지, 18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 시간은 테드와 빌리만의 시간이자 조안나의 부재를 통해 부자가 함께 성장한 시간이었다.
영화는 그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 열린 결말을 통해 성별이 육아나 경제적인 능력을 특정할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크레이머 부부의 행복했던 한 때. 사진 IMDB
임신 출산으로 인한 경력단절과 독박육아, 집안일의 분배 등 오늘날의 이야기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공감 가는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우리나라의 70년대를 생각하면 다소 파격적인 내용인 것 같지만, 당시 미국에서는 이미 이혼과 별거 및 양육권 분쟁이 사회적 의제가 되어가고 있었다.
40여 년 전부터 대두된 문제가 아직까지 사회적 이슈인 것이 씁쓸한 한편, 지금과 달리 법정에서 편견과 몰이해가 난무하는 장면을 보며 그래도 사회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가족과 육아에 대한 퇴색되지 않는 고전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는 왓챠에서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