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여주는 여자> 포스터. 사진 네이버 영화


[OTT뉴스=조수빈 OTT 1기 리뷰어] 요즘 가장 핫한 배우를 꼽으라면 단연 윤여정이라 하겠다.

74세의 이 노장 배우는 영화 <미나리>로 36개의 트로피를 수상한 데 이어 한국 배우로서는 최초로 미국배우조합상(SAG) 여우조연상을 수상, 아카데미에까지 발을 내디뎠다.

어떤 젊은 배우도 해내지 못한, 살아있는 역사가 되고 있는 그녀.

벌처(Vulture)와의 인터뷰에서 "현실에 안주하고 같은 연기만 반복한다면 난 괴물이 돼 버릴 거다"라고 말했듯, 배우 윤여정의 발걸음은 이따금 예상치 못한 곳으로 향했다.

자의든 타의든, 중년 여배우는 작품 선택의 폭이 제한적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윤여정의 선택은 국민 엄마가 아닌 탑골공원의 박카스 아줌마였다.

"나랑 연애하고 갈래요? 잘해드릴게."

영화 <죽여주는 여자(2016)>에서 그녀는 4만 원에 성매매를 하는 중년 여성 '소영'으로 분했다.

소영의 죽여주는 삶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매너리즘에 대한 윤여정의 각별한 경계가 느껴진다.

그녀는 왜 도구적 존재가 되었나

소영이 재우(전무송 분)에게 근황을 묻고 있다. 사진 네이버 영화

종로 일대를 일터로 삼는 소영. 탑골공원의 죽여주는 여자로 명성이 자자하다.

직업병(?)이 도져 찾아간 병원. 그 앞에서 갈 곳 잃은 코피노 소년 민호(최현준 분)를 만난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무시할 법도 하지만, 소영은 민호의 임시 보호를 자처한다.

"길에서 한 마리 주워왔어." 의문스러운 시선들에 무심하게 대꾸하는 그녀.

하지만 민호를 데리고 밥벌이하기가 쉽지 않다.

혈혈단신 38 따라지 인생. 먹고 살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다.

벌이가 좋다는 말에 동두천 양공주가 됐고, 정신 차리고 보니 갓난아이와 단둘만 남아 있었다.

생존을 위해 선택했던 일. 그러나 집도 절도 없이 노년기를 맞으려니 이제는 선택권도 없다.

단돈 4만 원, 때로는 더 저렴한 가격에 형성되는 권력 관계.

2평 남짓한 여관방 안에서 소영은 철저히 도구적 존재가 되어간다.

유효 기간이 확실한 관계 속에서도 간헐적으로 오가는 진심이 있다.

오래 전, 그녀를 따스하게 대해주었던 노신사가 있었다.

이제는 삶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병상에서 눈만 끔벅이는 그.

자꾸만 마음이 쓰이는 소영은 그를 위해 주체적으로 나서기로 한다.

좋은 사람을 돕고 싶다는 순수한 목적 하나로.

그러나 그녀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결국, 소영은 스스로 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도구로 다시 한번 전락한다.

산 넘어 산, 그 뒤에는 뭐가 있을까

민호를 데리고 일을 나서는 소영. 사진 네이버 영화


소영은 아들을 입양 보냈다. 기억은 오래된 사진 한 장에 묻어두었다. 그냥 미국으로 유학 간 셈 치고 살았다.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나타난 민호의 존재는 그 기억 위로 다리를 놓았다.

아들에게 사주지 못한 장난감도, 치킨도 자꾸만 사다 주고 싶다.

폐지 줍는 건 하기 싫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삶을 주웠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니까 부끄러운 건 없었다.

단지, 젊어서 넘고 넘은 산을 늙어서까지 넘어야 하는 게 서러웠을 뿐이다.

"거기 가면 세끼 밥은 먹여주는 거잖아요." 달리는 경찰차 안에서 소영은 차라리 이게 나으리라 생각한다.

드디어 버둥대지 않고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올겨울은 따뜻했으면 좋겠다고.

<죽여주는 여자>는 매우 느린 호흡으로 전개된다.

끊어질 듯 말 듯 힘겹게 끌고 가는 이야기가 주인공의 삶과 닮아있다. 그러나 지루하지 않다.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절제된 감정선은 영화의 몰입도를 높인다.

소영의 톡톡 튀는 말주변에서 언뜻 배우 윤여정 본체가 느껴지기도 한다.

윤여정은 재미교포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애플TV 드라마와 유니버설스튜디오의 아시아 프로젝트에 러브콜을 받은 상태다.

그녀가 세계를 무대로 또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까.

50년 경력 노장 배우의 뻔하지 않은 행보가 기대된다.

윤여정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는 <죽여주는 여자>는 현재 넷플릭스에서 시청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