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야수'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가? 미녀와 야수의 그 털복숭이 야수? 가수 비스트?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야수'로 검색을 하든 영어 'beast'로 구글링을 하든 야수의 이미지는 모두 남성이며 이때 나오는 여성은 <미녀와 야수> 속 그 미녀뿐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야수는 남성 명사지 여성 명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픽사에서 여자아이들에게 "네 안의 야수를 드러내"라고 말하는 영화가 나왔다.
바로 11일 디즈니플러스에서 단독 공개된 <메이의 새빨간 비밀(turning red)>다.
■ 여성 청소년의 사춘기
십대 소녀 메이는 엄마 때문에 좋아하는 남자 아이 앞에서 망신을 당한 다음 날 아침, 새빨간 렛서판다로 변한다.
메이는 화장실에 갔다 거울 속에서 판다로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소리를 지르고, 엄마는 영문을 모른 채 메이가 생리를 시작했는지 추측하며 온갖 브랜드의 생리대를 꺼낸다.
감독인 도미 시는 이때 빨간 색의 '렛서판다'가 생리혈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여자아이들에게 '생리'의 모습으로 찾아오는 2차 상징, 그리고 인한 감정과 욕망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영화는 2차 성징 이후 감정이 격해지고, 타인에게 욕망을 느끼기도 하며, 가정이라는 울타리보다는 친구가 소중해지는, 솜털 뽀송한 어린 아이가 아닌 몸과 마음이 변해가는 과정을 렛서판다로 유쾌하게 은유한다.
이 중 영화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메이의 '감정'이다.
메이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폭발할 때만 렛서판다로 변신한다.
처음에는 렛서판다로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냄새 나고 털이 난다고 혐오하고 숨기려 하지만, 친구들의 도움으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며 종래에는 판다로 변신하는 장점을 활용해 돈을 벌기도 한다.
영화의 결말에서도 메이는 판다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며 때로는 판다의 꼬리와 귀를 그대로 내버려두는 등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디즈니와 픽사가 최근 <겨울왕국>, <인사이드 아웃>과 같은 영화 속에서 여자아이들에게 너의 진짜 모습, 감정을 드러내라는 메시지를 선보이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동안 여성의 분노가 히스테리로만 치부됐던 역사를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메이의 할머니와 엄마는 모두 본인 안의 렛서판다를 봉인한 채 살아가지만, 메이는 이를 수용하고 본인의 일부로 인정한다.
또한 테일러가 엄마 욕을 하자 메이가 달려드는 장면도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데, 지금까지 영화에서 여자아이가 이렇게 위협적인 모습으로 남자아이에게 해를 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영화는 여성이 가지는 감정이 모두 자연스러운 것이며 비록 그게 야수와 같을지라도, 이를 수용하고 조절하는 능력을 배워야 한다는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 다양한 여성들의 관계
메이가 본인 안의 렛서판다를 받아들인 데에는 친구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메이의 새빨간 비밀>에는 메이와 늘 함께 다니는 세 명의 친구들, 미리엄과 애비, 그리고 프리야가 등장한다.
이 친구들은 인종도 외모도 성격도 모두 다르다.
메이의 엄마는 이 친구들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이들이 아마 메이가 엄마의 뜻을 거스르고 스스로 선택한 최초의 집단일 것이다.
친구들은 엄마는 모르는 메이의 본 모습을 알고 있으며, 같이 사고를 치고, 단 한 명이라도 빠지면 포타운 콘서트에 갈 수 없다며 단합한다.
여러분의 십대 시절을 떠올려보라. 우리는 매일 친구와 괴상한 모습을 따라하며 낄낄댔고, 친구와 내가 한 몸인 듯 굴었으며, 가족과 공유하는 것보다 친구와 공유하는 비밀이 훨씬 많아졌다.
또한 메이가 렛서판다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화장실에서 만난 여자친구들이 판다를 귀여워 하는 데에서 비롯됐다.
남자아이들의 전유물로 간주되곤 했던 우정과 의리를 여자아이들에게 가져와, 사춘기 여자아이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또래 여성친구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짚어냈다.
영화의 또 하나의 핵심은 엄마와 딸의 관계다.
메이는 친구들을 통해 본인 안의 렛서판다를 받아들였지만, 엄마와의 관계는 여전히 고민거리였다.
영화는 초반부터 동양인 가족들 사이에서 강조되는 '효'를 이야기 한다.
진짜 메이의 모습을 모르고, 여전히 어린 시절 착한 딸로만 남아있다고 생각하고 과잉보호하는 엄마 '밍'. 그리고 동양인 이민자 가족의 외동딸로서 더더욱 착한 딸이 돼야한다고 압박을 느꼈던 메이.
영화는 그런 엄마가 거대한 판다로 변하는 모습을 통해 밍이 개인으로서 가지고 있던 고뇌와 분노, 본인도 이민자의 착한 딸이어야 했던 과거,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느낀 압박을 드러내며 밍을 단순히 '극성스러운 엄마'가 아니라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냈다.
판다로 변신한 메이와 엄마가 싸우는 장면은 모녀가 진실된 모습을 서로에게 보여주는 장면으로, 이 영화의 압권이다.
메이가 엄마의 어린 시절을 보듬으며, 할머니, 엄마, 메이 삼대로 이어지는 화해와 사랑을 그려냈다.
K-장녀라는 말이 있다.
맛있는 걸 먹어도, 좋은 걸 봐도 왠지 엄마가 생각나는, 가족에 얽매인 한국의 첫째 딸들을 묘사하는 단어다.
영화를 본 첫째 딸들 모두, '때론 예전이 그립기도 하지만, 모든 건 변하기 마련이니까'라는 메이의 내레이션처럼 진정한 성장을 맞이하길 바란다.
이렇게 청소년기 또래 여자아이들의 우정, 그리고 엄마와 딸의 관계를 잘 녹여낼 수 있었던 건 이 작품을 이끈 주요 리더가 모두 여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디즈니플러스에서 제공하는 메이의 비하인드 제작스토리를 다룬 <판다를 안아줘!> 다큐멘터리에서 이들의 제작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중국계 캐나다인 감독 도미 시, 마찬가지로 중국계 이민자인 프로덕션 디자이너 로나 리우, 레즈비언 부부로 살며 입양한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시각효과 감독 다니엘라 파인버그 등이 등장해 제작 비화를 들려준다.
이들은 입을 모아 "팀의 리더가 모두 여성인 것은 처음 겪는 놀라운 일이며, 이것이 영화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감독 도미 시는 2012년 개봉한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브렌다 채프먼 감독 외에 10년 만에 나온 픽사의 여성 감독이고, 공동이 아닌 여성 감독이 단독인 건 픽사 최초다.
<판다를 안아줘!>에서는 도미 시와 로나 리우가 동양인 이민자 여성으로서 지낸 어린 시절, 픽사에서 여성 스태프로 겪었던 어려움, 또한 성소수자 스태프가 가정을 꾸리고 사는 이야기 등을 통해 영화에서 느낀 감동을 배로 느껴볼 수 있으니 꼭 참고하길 바란다.
■ 부숴진 전형성
<메이의 새빨간 비밀>에서는 모계가 강조된다.
그동안 다양한 프랜차이즈 영화에서 등장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신비한 능력으로 지구를 지키는 영웅의 이야기는 이제 거의 클리셰처럼 느껴진다.
최근 디즈니는 <엔칸토>에서 할머니로부터 이어받은 능력은 가족 일원들이 나눠가지는 모습을 보여줬다.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여기에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돼, 모계로만 이어지는 전통을 통해 여성들이 가진 격렬한 감정을 표현한다.
또한 외할머니와 외할머니의 자매들을 대거 등장시키기도 하는데, 외할머니와 외할머니의 자매들이 '밍'을 지키기 위해 봉인을 풀고 렛서판다로 변신하는 장면은 귀여움과 함께 여성들의 연대를 보여줘 뭉클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영화에 등장하는 아빠는 큰 역할이 없으며, 집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가정적인 모습이나 메이나 힘들어할 때 위로해주는 자상한 인물로 그려진다.
캐릭터가 보여주는 성격도 아빠는 다소 조용하며 소극적이고 엄마가 훨씬 적극적이며 열정적이다.
이렇듯 영화는 여성 가족들에 방점을 찍어 그동안 따뜻한 엄마, 자상한 할머니, 착한 딸 등 주변부에만 존재했던 가족 내 여성 인물들을 집중 조명한다.
또한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남녀 관계를 전복시킨다.
그동안 <토이스토리>, <업>, <루카> <코코> 등 남자아이가 주인공인 픽사 애니메이션에서 성장기는 남자아이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여자아이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조연으로 한 명 껴주거나, 아니면 남자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반대다.
남자아이를 향한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메이이고, 그런 메이에게 대상화되는 것은 남자아이들이다.
메이와 사총사는 운동장에서 운동하는 남자애들을 보며 낄낄거리고는 그들의 근육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런 장면, 어디에서 많이 보지 않았는가? 그래. 바로 전형적인 미국 성장 영화에서,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들을 보며 품평해 짖궂음을 드러내는 방식과 비슷하다.
또한 포타운 콘서트 이후 사총사 사이에 낀 테일러를 보며, 이 또한 그동안 구색을 맞추기 위해 남자아이들 사이에 여자아이를 하나씩 끼어넣곤 했던 애니메이션의 규칙을 변형했다고 느꼈다.
또 하나 더!
<메이의 새빨간 비밀>에 등장하는 여자아이들은 아름답지 않다.
메이는 동양인다운 주먹코에, 오동통한 몸, 두꺼운 팔과 다리를 가졌다.
메이의 친구들도 모두 평범한 외모를 가졌으며, 그 어느 아이 하나 외모로 주목받는 설정은 나오지 않는다.
앞서 <메리다와 마법의 숲>을 연출한 브렌다 채프먼 감독은 "메리다의 외모를 실제 여자아이처럼 만들고 싶었다. 가늘고 마른 다리와 허리를 가진 인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밝히며, 메리다의 캐릭터를 조형하는 과정에서 픽사와 갈등이 있었음을 시인한 적이 있다.
디즈니가 비현실적인 외모를 가진 공주 캐릭터로 비난을 받아온 가운데, <메리다와 마법의 숲>이 개봉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 최근 <엔칸토>와 <메이의 새빨간 비밀>에서 평범한 외모를 가진 여자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데에 의의를 두고 싶다.
■ 왜 OTT로 직행했을까?
이처럼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여성 청소년 성장 영화로서 훌륭한 자질을 모두 갖췄지만, 극장에서 개봉하지 못하고 OTT로 직행했다.
이에 많은 팬들이 아쉬움을 내비추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감독 도미 시는 테크레이더와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극장용으로 만들었다고 했으며, 제작자 린지 콜린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기쁘지만, 극장에 걸리지 못한 것이 엿같다(kind of sucks)"고 말했다.
인사이더는 익명을 요구한 픽사의 직원들이 인터뷰에서 "우리 모두가 극도로 실망했다. 그것은 상당한 타격이었다"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고 전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많은 영화들이 OTT로 직행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디즈니는 작년 하반기 <엔칸토>를 한 달 여간 극장에서 먼저 개봉한 적이 있는데, <메이의 새빨간 비밀>과 <엔칸토>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여전히 의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메이의 새빨간 비밀>을 보기 위해 디즈니플러스를 구독했다면, 이 영화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이 내린 결정에 만족할 것이다.
어린 시절, 남자아이들을 타깃으로 한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신발 광고가 끝나고 나면 구석에 조그맣게 핑크색 글씨로 '여아용도 있어요'라는 문구가 등장하곤 했다.
없는 것보단 낫다지만, 어쩐지 씁쓸했던 것이 사실이다.
아마 그 '여아용'이 진짜 여자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남아용의 부록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거다.
마찬가지로 남자아이들의 성장 영화만 가득했던 세상에서, 여자아이들의 성장기를 다룬 영화가 등장했다.
그리고 그 영화는 단순히 남아용의 부록이 아닌, 진짜 여자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여기 여아용 성장 영화도 있어요!"
그리고 그 '성장 영화'는 구석에 쓰여진 작은 핑크색 글씨가 아니라 선명한 빨간 글씨로 새겨질 것이다.
저작권자 ⓒ OTT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ottnews.kr